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well dylng
    내가 사랑하는 여자 2012. 5. 4. 02:20

     

     

     

     

      나이 탓일까? 천국행 기차를 탈 사람들에게 잘가라는 인사를 건네는 일이 이 세상에 온 아기를 환영하는 일보다 훨씬 잦아졌다. 오늘도 천국행 기차가 지나는 대합실에 다녀왔다.

    즈음엔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영원한 명제 앞에 머무르는 시간이 꽤 많아짐을 느낀다.

    세상에 well being 이라는 단어가 유행병처럼 번지면 번질수록 나는 well dying이라는 단어에 더 깊게 관심이 쏠렸다.

     

    ‘암 병동’ 그리고 ‘호스피스 병동’ 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이다. 기대보다 두려움과 고통이, 희망보다 절망이 더 많은 곳이다. 보름 후에 있을 중3 딸아이 졸업식에 참석하는 게 마지막 꿈이라며 해맑게 웃던 40초반의 한 여자가 있었다. 그 환자가 한마디 인사도 없이 딸아이의 졸업을 며칠 앞두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런 일은 어느새 내 일상에서는 다반사가 되어버렸지만 아픔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화석이 되어 내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딸아이들에게 입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옷을 만드느라 뜨게질을 하던 모습이 담긴 그림 한 폭을 남겨둔 채 어느새 또 다른 환자가 그 자리에서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많은 환자들을 만나지만 돌아 와서도 늘 잊혀 지지 않는 환자가 있게 마련이다. 오늘은 8병동에서 만났던 베로니카 부부의 영상이 밀레의 그림 ‘만종’을 연상케 했다. 남편은 아내의 왼 눈을 거즈로 막고 반창고로 붙여주고 있었다. 손끝은 물론, 속눈썹도, 입술마저도 파르르 떨던 남편의 몸짓은 울컥 내 목울대를 흔든다. 암세포가 폐에서 뇌로 전이가 되었고 시신경을 건드려 보이는 대상의 흔들림 현상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함이란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절규는 손끝으로 전달되는 듯 베로니카의 손은 잔뜩 힘이 주어져 늘 주먹을 쥐고 있다. 수차례 만나도록 침묵으로만 일관하던 베로니카는 오늘도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가요?. 내 기도를 듣기는 하실까요?

    한참동안 흐르던 고요를 깨고 조용한 흐느낌이 시작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환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을 한답시고 그들의 마음을 자극하여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바탕 눈물 바람을 일으키고 난 후, 한줄기 소낙비가 지나간 청명한 하늘 언저리처럼 그들도 나도 비로소 마음의 평정이 찾았다. 어느 시인은 ‘눈물은 왜 짠가?’ 라고 반문했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눈물에서 단 맛이 남을 알았다.

      여자나이 44세, 나는 그 숫자와 마주 할 때면 늘 전율을 느낀다. 환자를 만나기 전에 환자의 나이와 고향, 가족관계, 이름을 확인하는 것은 대화의 물꼬를 트기위한 최소한의 정보이기도 하다. 오늘 만난 그 환우의 나이가 내 어머니가 청상이 되신 바로 그 나이 44세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생명줄을 놓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눈물 그렁한 눈꺼풀을 쓰다듬으며 걱정말고 편히 가시라했다던 어머니의 모습이 조용히 오버랩된다. 같은 나이에 한 여인은 남은 사람이 되고, 한 여인은 떠날 준비를 한다. 44세, 아직은 할 일이 많은 나이, 해야 할 일이 많은 나이라 안타까움 그지없다. 누구든, 어떻든 안타까움을 남기지 않는 죽음이었음 싶다.

     

      어느 종교에서는 이승을 찰나라고 하고, 어느 종교에서는 천국을 가기 위한 전 세상이 이승이라 하듯이 태어나는 것이 축복이라면 죽는 것 또한 축복이었으면 좋겠다. 나만은 적어도, 나만은 축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삶은 강 군데군데에 쌓여 물 흐름을 가로막는 모래톱 같고, 아픔은 모래톱에 엉켜 소용돌이를 친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신발 한 짝을 따라가며 울부짖던, 끝내 남은 신발 한 짝을 버리지 못 한 채 두 손으로 꼭 껴안고 맨 발로 귀가하는 어릴 적 심정이 곧 암 병동을 나서는 심정이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울부짖으며 쏟아내는 분노, 하필이면 왜 나인가에 대한 억울함으로 몸부림치는 환자에 손을 잡는 일, 그 일 밖에는 해 줄 일이 없음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내 삶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내 죽음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의 죽음에 관여한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끝이 없다. 암으로 투병하는 환자들 앞에서는 편한 숨조차도 죄가 될 것만 같아 가두어 뒀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고 나면 한 줄기 단 바람이 코끝에 머문다.

     

      내가 well dying에 관심이 많지만 어쩌면 그 조차도 욕심일 수도 있다. 고통없이, 번민없이, 회한없이 편히 가고 싶다는 욕심... 물처럼, 바람처럼 순리대로 욕심없이 살다가 태어남의 축복처럼 축복 속에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well dying 이 아닐까 싶다.

    '삶도 죽음도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라며 홀연히 유명을 달리한 전직 대통령의 글이 며칠째 내 머릿속에서 고추잠자리처럼 맴을 돈다. 죽음이 그다지 슬퍼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함께...

     

     

     

     

    '내가 사랑하는 여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사는 세상을 그 누가 모르랴  (0) 2013.06.01
    식물 그리고 인간  (0) 2012.05.04
    중랑천을 걸으면서  (0) 2012.05.04
    수필(매듭풀기)  (0) 2012.05.04
    노년의 지혜 (팽목항에서)  (0) 2010.04.12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