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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필(매듭풀기)
    내가 사랑하는 여자 2012. 5. 4. 02:03

     

    마음이 울적하거나 어쩌다 마음이라도 다치는 날이면 나는 버릇처럼 메밀밭을 찾아 고향으로 간다. 그리고 오랫동안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다는 메밀밭에 앉아 그때 일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리곤 한다.

    친정아버지의 제사를 모신 후면 나는 늘 며칠씩 마음 앓이를 한다. 그날은 내 마음처럼 창밖엔 봄눈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눈이 오는 설렘이면 좋으련만!

    딱히 편지 올 곳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습관처럼 메일함에 손이 갔다. 자동차 클러치를 밟듯 클릭을 하는 순간 nayo 라는 아이디의 편지 한통이 반긴다. 반갑다고 하기에는 그 사이 너무 서먹하게 지내왔고, 한때는 호주와 매(妹)의 사이였기에 안 반갑다고 할 수도 없는 사촌오빠로부터 온 편지였다. 시간되면 내일 원자력 병원 12시에 좀 와 줬음 한다는... 시골에서 원자력병원으로 온다는 것만으로도 정전된 후 켜진 원색의 백열등처럼 먹먹했다. 눈발은 더욱 세차게 흩날리건만 시간은 그리 급하게 흐르진 않았다.

     

    아버지는 종손이지만 대를 잇지 못하셨다. 결국 하나뿐이던 조카를 양자로 맞아 애지중지 기르던 중 세상을 등지셨다. 당신 딸 다섯보다 양자 아들에게 쏟은 정성이 더 컸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고 딸들의 희생은 오빠가 선생님이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오빠가 결혼을 하면서 본가와 양가, 두 집에 하나뿐인 올케와의 갈등이 간단치 않았다. 현명한 사람은 매듭을 풀고 어리석은 사람은 매듭을 짓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풀어야할 매듭이었다.

    아버지의 산소를 다녀오는 길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메밀밭 둔덕에 오빠와 나란히 앉았다. 메밀꽃이 피어있는 산기슭엔 항시 산안개가 자욱했다. “오빠 왜 메밀밭엔 항상 산안개가 자욱할까?” 선생님인 오빠에게 묻는다면 모든 것은 해결되는 걸로 믿을 만큼 오빠는 내게 크나 큰 자랑이었다. 오빠는 바다가 가까운지라 해무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바다엔 어렸을 적 즐겨 탔던 똑딱선이 흰 포말을 가르며 마을을 향해 들어오고 괭이 갈매기가 배 주위를 선회하며 끼룩거리는 걸로 봐서는 만선인 듯했다. 둘 다 엷은 미소만 띄고 말이 없다. 이심전심으로 세상모르던 어릴 적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우리 가족사에 있어 큰 매듭을 풀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엄마도 올케도 모두 힘들지만 오빠가 제일 힘들다는 거 알아” 오빠의 앙 다문 입술과는 달리 양 눈은 이미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는듯했다.

    그날 엄마의 반발도 없잖아 있었지만 열 아들 노릇을 하겠다는 약속으로 오빠의 양자라는 굴레를 벗어주며 인위적인 관계의 매듭을 풀었다.

    원자력병원 마당엔 전날 내린 진눈개비로 몹시 질척거렸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선 후 서먹할 수밖에 없는 세월을 살아왔지만 한 솥밥을 먹은 정은 서로에게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 첫사랑 이상이었다. 삶에 대한 염원을 담은 듯이 v자가 쓰여 진 챙이 있는 모자를 쓰고 나타난 오빠는 벌써 왜소해 질대로 왜소해져 만지면 와삭 부서질 것 같은 마른 낙엽 같았다. 채혈 실 앞에 나란히 앉았다. 오랜만에 만났건만 꽤 긴 시간 서로의 손만 만지작댈 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간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데 무슨 스트레스를 그리 받았기에...” 라는 말끝에

    오빠는 자업자득 자초한 스트레스들이지 뭐“ 트레이드마크인 윗 덧니를 살짝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닌 잘하지만 말이다, 조금 힘들더라도 후회가 남은 일은 없이 살아라, 내가 할 일을 니가 하면서 살았지,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오라고 했어, 내가 저 세상에 가서 아버지를 어떻게 뵐지...”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깊이를 알 수없는 우물에 두레박이 떨어질 때의 첨벙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또는 새벽 산사를 울리는 종소리처럼 내 전신을 두~웅하고 오랫동안 휘감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매듭을 푼 것이 아니라 편한 대로 매듭을 잘랐고 오빠는 그 매듭의 조각들을 안고 살아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대도 나는 항시 그 일에 대해서는 자랑스러워하며 살아왔지 않았던가!

    사람이 입장에 따라서, 나이에 따라서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음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안개를 보고도 산안개과 해무라고 달리 말하듯이 말이다.

    일주일째 물 한 모금 못 마셨다는 오빠를 모시고 원자력병원 마당을 가로질러 본 죽 가게로 들어섰다. 서너 평 정도의 작은 가게였지만 정갈하고 안온해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피하기에도 아주 좋았다. 주인은 오빠를 보더니 많이 편찮으신 모양이라며 염려를 해준다.  표정마저 편안해 다른 경우 같았으면 으레 고맙다고 너스레를 떨었을 텐데 그럴 상황은 이미 못 되었다. 앉아 있기조차도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며 목구멍에 주먹만 한 옹이가 목구멍을 치밀었다. 오빠의 마음고생 덜어 줄려고 내가 모든 짐을 짊어졌건만 왜 그 지경이 되어 나타났는지 올케를 붙잡고 따지고 싶었다. 마음껏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메뉴판을 내미는 주인에게 “여기서 가장 맛있는 걸로 주세요.” 마음속으론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도 못 마시겠다던 오빠는 무슨 죽이 이렇게 맛있냐며 반 그릇이나 비우셨다. 주인은 비싼 건데 남은 건 가져가시라며 정성이 가득한 포장까지 내어주었다. 그 후 병원에 계신 동안 나는 밤낮으로 본 죽의 특별 식으로 오빠의 원기를 돋워 드리려고 애썼지만 첫날처럼 드시지는 못했다.

     교장선생님인 오빠는 악동들의 입학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3개월 시한부 선고장을 받아들었다. 항암치료로 어지럽게 내려앉은 머리카락과 함께 오빠의 양어깨에 만감이 소복한 듯 했다. 오빠는 힘든 말을 이어나갔다. “그땐 니가 참 고마웠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것이 너무도 큰 매듭이었지” 더 이상 들을 자신이 없어 서너 발자국을 걸어 창밖을 내다보니 만개한 영산홍 화분 하나가 배달되어 오고 있었다. 흙빛에서도 저리 화려한 꽃을 피워내는데...  인간의 능력밖인 현실에 안타까움만 더해갔다.

    그날 오후 암과 싸워 이기고 싶습니까? 원자력으로 오십시오! 라는 아이러니한 포스터를 뒤로하고 암과 한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오빠는 병원 문을 나섰다.

    밤낮을 함께 한 열흘이 어쩜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시려왔다. 코끝이 시리고 눈마저 시렸다.

     온 몸이 오한으로 떨려왔다. 병원에 오던 날과는 달리 하늘은 왜 그리 맑던지... “끝까지 네겐 짐만 되었구나!” 하시며 나를 안아주시려 했지만 힘에 부처 내가 오빠를 안아 주고야 말았다. 오빠를 태운 차가 꼬리를 감출 때 까지 나는 장승처럼 망연자실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세상이 온통 꽃 잔치로 아우성일 때 오빠는 죽음으로서 모든 매듭을 놓으셨다. 사람은 정녕 꼬인 매듭을 살아서 풀기란 그리도 어려운 것일까? 검은 리본을 두른 영정속의 오빠는 여전히 윗 덧니를 살짝 드러낸 채 웃고 계셨다. 매듭은 짓지도 말고 자르지도 말고 풀면서 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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